2008. 5. 1. 16:16

물병자리의 진보적 사랑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랑을 원하신다면

과거를 묻지 않는 물병자리의 사랑


그해 여름, 세상은 명분 없는 전쟁에 빠져들었고, 어른들은 낙서하는 젊은이들을 잡아다 그 손에 총을 쥐어 주었다. 낙서는 나쁘다고 나무라면서, 그들은 사람 죽이는 법을 가르쳤다. 성난 젊은이들은 부모에게 삿대질을 하며 거리로 뛰쳐나갔다. 부모와 결별한 자식들은, 잿빛 도시를 떠나 햇빛 가득한 새 땅으로 모였다. 남자들은 더벅머리에 수염을 기르고 맨발로 거리를 뒹굴었으며, 여자들은 미니스커트에 샌들을 신고 커다란 펜던트를 목에 걸었다.


이름 높은 게이 시인은 " 아메리카여, 당신의 원자폭탄과 함께 꺼져 버려라 " 고 외쳤다. 그들은 연좌농성을 벌였으며, 통제하는 경찰들의 총구에 꽃을 꽂았다. 기성의 제도와 관습과 통념을 마음껏 까부수었다. 일은 하지 않았고, LSD를 각설탕처럼 삼켰으며, 아무에게나 자기를 열어 보였다. 나이라든가 인종이라든가 계급이라던가 성별이라든가 하는 꼰대들의 구분은 무시할 수록 좋았다.


가장 개인적인 행위인 사랑조차도, 두 사람만의 고루한 속박을 뛰어넘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다. 사랑의 상대를 공유했으며, 그 결과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자유의 아이들, 소위 꽃의 아이들, 을 낳았다. 거리에는 새 시대의 복음성가인 록큰롤이 울려 퍼졌다. 1960년대의 일이다.

세상은 이 젊은 이카루스들을 히피라고 불렀으며, 그들의 행동에 플라워 무브먼트라는 낭만적인 이름표를 달아 주었다.


뉴에이지, 혹은 물병자리 시대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회자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혁명가와 반항아를 겸하는 이 젊은이들은, 아버지의 세상을 뒤엎고 건설할 신천지의 이름을 아버지 세대가 외면했던 점성학에서 발견했다. "빛과 조화의 시대" 라고 정의된 물병자리의 상징에 그들은 매혹당했다. 게다가 그 시대의 시작이 1900년대 초에 열린다고 되어 있으니, 이것은 자신들의 움직임에 뒷심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기쁨에 들떠 그들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 달이 일곱번째 집으로 들어가고
목성이 화성과 만나면
평화는 행성들을 지배하고
사랑은 모든 별에 가득차네
이제 물병자리 시대가 열리는 거지 "


지금은 잘 들을 수 없지만, 내가 중학생일 적만 해도 라디오에서 곧잘 나오던 <Aquarius>란 팝송이다. 알고보면, 거리의 철학자 "기나 도" 선생님들의 단골 메뉴인 "후천개벽설"과도 상통하는 내용이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사람들은 이 황당한 이야기를 곧이 들었을까?


그 계산법의 출발은 이것이다. 지구는 열두 별자리의 영향권을 차례로 지나는데, 별자리 하나를 지나는 데 약 2천년씩 걸리며, 한 바퀴를 완전히 도는 데는 약 2만 5천 년의 세월(아마 플라톤 력이라고 하죠?) 이 걸린다. 그런 식으로 따져 보았을 때, 지구는 19세기 초에 물병자리 시기에 진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점성학 자체가 아직 '믿거나 말거나'의 수렁에서 발을 빼지 못하고 있는 판에, 이런 시대 구분법을 믿어주십사 하고 바라는 것은 언감생심이겠지만, 그래도 꽤 흥미로운 논거들이니 일단 들어보시라.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출현하는 성자들이다. 그들의 역할은, 점성술에 따르면, 붕괴하는 이전 시대에 종언을 고하고, 세기말적 두려움에 빠진 동시대인들에게 새로운 비전과 소망을 일깨워주는 일이다.


아닌게 아니라, 기묘하게도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성자들은 양자리에서 물고기자리로 넘어가는 BC 250년을 전후해 집중적으로 탄생하고 활약했다. 특히 BC 6세기를 전후한 성자들의 등장은 눈이 부실 지경이다. 붓다, 노자, 공자, 피타고라스, 조로아스터, 페리클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맹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줄지어 탄생했다. 거꾸로 생각하자면, 이들이 그토록 우후죽순 격으로 태어나 영혼의 빛을 방사해야 했을 만큼 몰락해 가는 시대의 어둠이 깊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양자리의 끄트머리에서 물고기 중의 물고기, 그리스도께서 탄생한 것이다.


BC 250년에서 1900년에 이르는 2천여 년은 온통 예수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가 백년 이백년 단위로 생각하면 뚜렷한 차이를 느끼기 어려워 그게 그거 같지만, 적어도 오백년, 천년 단위로 생각의 폭을 넓혀 보면 예수의 시대는 이전 양자리 시대와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자리 시대는 영토의 개념이라는 것도 없이 막무가내식 정복전쟁과 그를 위한 전사의 양성이 당면 과제였던 시기였지만, 물고기자리 시대로 들어오면 어렴풋하게나마 영토의 개념이 자리잡히고 맹목적인 정복전쟁은 피차 손해라는 생각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다. 전사의 영광은 이제 사제에게로 넘어간다. 그리고 물고기자리 시대답게 지구 전체를 여행할 수 있는 뱃길이 열린다.


감성이 깊으면 슬퍼지고, 이성이 깊으면 괴팍해진다. 다르게 말하면, 감성이 깊으면 신비가가 되고, 이성이 깊으면 혁명가가 된다. 이것이 물병자리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단서다. 이성은 그것이 고도로 응축되면 과학이 되고, 그것은 운명적으로 혁명과 발명을 요구하게 된다. 그래서 물병자리의 또다른 이름은, 낡은 질서와 가치관을 두들겨 부수는 망치라는 것이다.


이 해방과 진보의 대장정은, 종교개혁과 르네상스에서 싹트기 시작해 산업혁명으로 이어지고 물병자리 시대의 개막인 1900년대를 전후해 정점에 달한다. 세계 곳곳에서 민족해방운동이 불붙고, 이어 온갖 차별과 억압을 철폐하려는 시위가 구석구석으로 번진다. 민권운동, 여성운동, 노예해방운동, 흑인운동, 노동운동, 환경운동....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운동과 운동의 방법론이 한 시기에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또한 발명의 세기였다. 발명과 혁명은 쌍생아인데, 왜냐하면 둘 다 기존의 사고를 깨뜨릴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럼 여기서 (지면 관계상) 아주 중요한 새 개의 발명만 짚고 넘어가자.


그것은 전기와 항공기와 로봇의 발명이다. 전기는 밤낮없이 일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인간을 태양의 지배에서 해방시켰고, 비행기는 숙명처럼 속박하던 땅의 인력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로봇은 인간을 한낱 피조물의 위치에서 조물주의 위치로 격상시켰다. 또, 그로 인해 장차 인간복제와 인공지능으로 야기될 도덕적 혼란을 자초했다.


인간은 편리함을 얻은 대신 자연을 잃었다. 그 자연의 다른 이름은 신이다. 인간은 이제 신에게 귀를 기울이거나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물병자리 시대의 사람들은 신을 이성적으로 재해석하며, 그를 의인화하는 미망에서 벗어나 인간이 도달해야 할 어떤 상태로 상정한다. ( 이것이 그토록 기독교가 뉴에이지를 혐오하는 이유이다. )


히피즘도 그랬다.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쳤지만, 그들의 방식에는 자연이 없었다. 그들은 인공자연을 건설했을 뿐이다. 가족을 떠나, 여자도 남자도 아닌 옷차림을 하고서, 세상에서 가장 얕고 넓은 사랑을 나누면서, 약을 먹고 신성에 도달하려고 했다. 1960년대 캘리포니아는 일종의 실험실이었다. 세상의 고정관념들이 산산이 공중분해 되었다.


나는 사랑에 대해 이보다 더 과격한 실험을 한 사람들을 알지 못한다. 가장 사적인 체험인 사랑을 그들은 "공유"하고자 했다. 사랑에서, 사랑의 불순물인 질투를 빼고, 소유욕을 빼고, 의존성을 제거하려 했다. 단점을 없애면 장점까지 사라진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던 것일까? 아무튼 이성의 절제 수술 결과, 사랑은 사랑이라기보다 우정이나 동지애에 가까워졌다. 그들은 독립적이었기에 쉽게 만났고,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쉽게 헤어졌다. 사랑은 둘만의 은밀한 행복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실천의 한 가지가 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 때문에 오래도록 외로웠다. 올바름의 대가였다.


나는 그들과 비슷한 외로움을 우리의 60년대 그리고 80년대 선배들에게서 본다.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 라고 쓴 것은 시인 김수영이었지만, 이것은 그 시기 많은 젊음들의 공통 고뇌였다. 감성은 자기 속으로 골똘히 파고드는 인식이지만, 이성은 자기조차 외면하도록 만드는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의 성향이 만드는 외로움을, 자기의 노력으로 세상이 약간은 나아지고 있다는 것으로 위무하려 한다. 하지만 그게 잘 될까?


내가 기억하는 가장 물병자리적인 영화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다. 작고 애처로운 소년 할리 조엘 오스먼드는 거기서 물병자리라면 단박에 감동하고 말 아이디어를 낸다. 내가 세 사람을 도와주면, 이 세 사람이 각각 세 사람씩 도합 아홉 사람을 도와주고, 그 다음엔 아홉 사람이 각각 세 명씩 도합 스물일곱 명에게 도움을 주고..... 그러다 보면 세상을 아름답게 바꿀 수 있지 않겠느냐고, 소년은 천진한 눈망울로 말한다. " 세상이 엿 같다" 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반항적인 꼬마가 말이다.


그는 거리의 부랑아를 데려다 음식을 먹이고, 알코올 중독자 엄마를 담임 선생님과 연결시키고, 결국 위기에 빠진 친구를 도우려다 목숨을 잃기까지 한다. 그의 휴머니티는 참 숭고하고 감동적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그의 휴머니티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다. 폭력적인 아버지다. 그 역시 과거를 뉘우치고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트레버는 결코 마음을 열지 않는다.


남에게는 목숨을 바칠 지경으로 헌신하면서, 혈육에게는 눈곱만큼의 동정심도 아까워하는 이 이상한 모순. 이것은 '독선적인 운동가' 라는 말로 상징되는 - 남은 바꾸려고 하면서 자기는 결코 바뀔 생각이 없는 - 물병자리식 모순의 한 변형이다. 그것은 이렇게 해명된다:


남을 잘 돕기 위해서는 자기를 돕지 말아야 한다. 남들을 바꿔 놓으려면 나 자신의 생각은 단단(완고)해야 한다. 그 '자기'의 범주는 가까운 피붙이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물병자리 사람의 가족이나 애인이 그에게 도움을 구하려면, 그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줄을 서야 할 것이며, 심지어 차례가 오더라도 " 당신은 다음에 오지 " 하고 외면을 당할 것이다.


왜냐면 그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니까! 가까이 갈수록 따스하지 않았던 운동권 선배들의 비애를 알 듯도 하군. 하지만 이건 여전히 묻고 싶다. 그들이 관심 있었던 건 정의일까? 인간일까?



글- 페이퍼 김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