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5. 1. 15:20

염소자리의 힘겨운 사랑

나는 내가 행복해지는 게 두려워

고생을 사서 하는 야심가, 염소자리의 사랑



아버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조깅을 하셨다. 비가 와도 기어이 우비를 쓰고 나가 4킬로미터 남짓한 거리를 완주하고서야 돌아오셨다. 일기쓰기도 그러하셨다. 안방 반닫이 서랍 속에는 삼십년이 넘도록 하루도 빼놓지 않고 쓴 아버지의 일기장들이 첩첩이 쌓여 있었다. 늦는 법도 한눈 파는 법도 없었고, 술 담배도 마음먹은 날 바로 끊으시고는 일절 손대는 법이 없으셨다. 목표에 대해 악착같았고 다부지셨다.


아버지는 위대하셨다. 그러니 성격이 얼마나 대단(?)하셨겠는가. 덕분에 나는 엄청나게 맞았다. 아버지는 모든 일을 일벌백계로 다스리셨다. 딸이 가진 안이한 희망도 싫으셨고, 대책 없는 연애도 못마땅하셨다.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런 이상한 방식으로 대화를 했고 그 부작용으로 서로를 이해하기까지 되었다. 우리는 서로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강박관념, 편집증, 야심, 욕망에 대한 게걸스러움. 아버지는 거기에다가 당신의 가장 큰 강점인 탁월한 맷집까지 손수 키워주셨다. 상처가 아물면서 생기는 굳은 살들 덕분에 나는 섬세함을 잃었고, 대신 내구력을 얻었다. 염소자리가 자랑하는 다부진 무릎과 강인한 어금니, 스테인리스 척추. 그래서 나는 가끔 생각하게 된다. 나는 아버지를 상대로 인생에 대한 모의전투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염소자리에게 인생은 생존 게임이니까.

염소자리는 참 칙칙하다. 늙은 남자. 그 중에서도 가장 매력없기 십상인 아버지의 기질과 상통한다. 모든 어머니가 상처받기 쉬우며 감상적인 게자리라면 모든 아버지는 현실을 짊어지고 묵묵히 황야를 건너는 염소자리다.


그래서 나는 조금 걱정이 된다. 염소자리라는 게 워낙 구질구질하고 갑갑한 구석이 많아서, 얘기를 할 수록 나에 대해 밥맛이 없다고들 할까봐서다. 여태까지 물고기자리의 연민이다, 사수자리의 낙천성이다, 해서 분위기 좋았는데, 여기서 기어이 독자의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보니 고민조차도 염소자리적이군. 알량한 평판에 흠집이 날까봐 전전긍긍하는 꼴이라니.


하지만 내가 그럴만도 한 것이, 염소자리는 내 인생에서 가장 인기없던 시절에 영향력을 발휘한 별자리이기 때문이다. 나는 염소자리에 달이 있는데, 달은 흔히 사람의 유년기를 지배한다. 그러니까 나는 열살도 안 돼서부터 노인의 고민을 짊어지기 시작했다는 건데, 당사자가 갑갑한 건 둘째치고 주위의 반응이 아주 냉담했다. 도대체가 무슨 어른들이 아이를 옆에 앉혀 놓고 "얘는 말썽을 안 부려도 정이 안 가요."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사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살아갈 날들이 무서워 잠을 설쳤다. 학교로 향하는 내리막길에서 걸핏하면 넘어지곤 했는데, 그러고 나면 "나는 죽을 때까지 몇 번이나 더 넘어져야 한단 말인가" 싶어 한숨을 폭폭 쉬었다( 이 소리를 했더니 내가 아는 염소자리 친구는 자기는 어릴때 숟가락을 드는 게 너무 무거워서 "죽을 때까지 이 고생을 해야 한다니" 싶었다고 응수했다. 내 생각에도 엄살이 너무 심한게 아니냐는 기분이 들지만, 아뭏든 요는 염소자리들은 인생이 고해라는 걸 일찌감치 깨닫는다는 얘기다. )


나는 열등감에 찌들어 말없는 아이가 되었다. 발표를 시키면 억지로 더듬거리다가 우는 걸로 끝장을 봤다. 장난기가 발동한 아이들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내 친구라고는 달랑 짝궁하나. 혹은 앞집에 사는 급우 정도이니 "모의"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좀 창피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나는 초등학교 시절 두번의 왕따를 겪었다. 그 뒤에는 무슨 재주로 안 겪었냐고? 아무리 바보 같기로서니 같은 일을 세 번이나 겪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나는 염소자리들의 인생이 흔히 그렇듯 고통의 대가로 깨달음을 얻었다. 아무도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고립될 만한 위치에 자신을 놓지 않기 위해서는, 친구관계에도 일종의 "거래선 다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정치적이 되었다. 필요한 사람과 불필요한 사람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공부라도 잘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 콤플렉스에 대한 보상심리, 그래서 염소자리들은 그토록 아득바득 출세를 향해 내달리는 가 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신이 바지 아래로 지나가는"식의 수모마저 달게 받아들이면서. ( 어떤가? 이제 좀 질리는 기분이 들지 않는가? 하지만 이것이 "영원한 왕따" 우리 아버지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아버지들은 그 많은 불안과 두려움을 지우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거울 앞에 서야 하는 것일까?


염소자리들은 기질만 정치적인 게 아니라 실제로도 많은 정치가들을 배출해 왔다. 리처드 닉슨, 모택동, 취스턴 처칠, 박정희, 김대중에 이르기까지 정치가들은 염소자리와의 인연을 두텁게 쌓고 있다. 그들은 염소자리 인생의 트레이드 마크인 "고난을 통한 영광"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 영광이 과연 얼마나 떳떳한 것인가는 장담하기 어렵다.


올리버 스톤의 영화 <닉슨>은 성경을 인용하며 도입부를 연다. " 인간이 세상을 얻더라도 그 자신의 영혼을 잃는다면 무슨 득이 되겠는가?" 이것이 아마도 하나의 답이 되지 않을까? 그는 권력을 위해 영혼을 몽땅 팔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삼분의 일 정도는 들어냈을 것이다.


예술가들의 경우에도 염소자리들은 자기가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악전고투를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불필요한 고생을 사서 하며, 더 나아가 고통을 즐기는 악취미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후기 인상파 화가 세잔은, 인상파들이 진작에 추구해온 색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염소자리답게도 사물의 실제감을 동시에 구현해 보이겠다는 야심에 사무쳤다. ( 염소자리는 뭔가 견고한 것을 추구하기 마련이니까 )


그리고 그 바람에 같은 그림을 수십 번, 수백 번 고쳐 그리는 소위 "세잔의 자살 행위" 를 치러야 했다. 남들에게 자신의 목표를 설명하는 것도 포기한 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증과 발작에 시달리면서.


염소자리는 왜 그렇게 고통을 향해 나아가는 것일까? 매에는 장사도 없다는데. 염소자리라고 통증이 감미로울 까닭도 없는데. 그것은 그들이 처음에는 야심 때문에 고통을 감수하지만, 나중에는 고통을 통해 얻어진 것만이 정수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또, 그런 혹독한 스트레스 속에서만이 위대한 힘이 나온다는 것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왜 우리는 맨몸으로 산을 오르기보다, 약간의 짐을 지고 오를 때 더 수월한 것일까? 염소자리는 이 신비를 빨리 알아챈 사람이다. 그는 세상의 무거운 짐을 걸머지고 바위산 정상을 올라간다.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짐을 마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안다. 그렇다면 언제쯤 그는 가혹한 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는 영영 짐을 내려놓지 못할지도 모른다. 짐을 지고 있는 상태에 익숙해진 나머지 내려놓는 법 자체를 까먹게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또, 새로운 야심에 눈을 뜬 나머지 더 많은 짐을 일부러 짊어지고 삭풍과 만년설의 산정을 찾아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날지도 모를 길이다.


하지만 그래도 상당수의 염소자리는 마흔이 넘어가면서 야심의 결실도 맺고, 그러면서 짐도 하나둘 내려놓기 시작한다. 젊어서 매력이 없던 것과는 반대로 염소자리는 나이가 먹을수록 관록과 노련함이 주는 매력을 발산하게도 된다. 뻣뻣하던 이 사람에게 " 녹슨 미소" 같을망정 유머도 찾아든다. 그는 조금씩, 그토록 옥죄던 마음의 빗장을 연다. 그래서 염소자리에게 인생은 사십부터다. 그리고 종종, 사랑도 그러하다.


염소자리에게는 무엇이건 늦게 주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토록 바라던 성공도, 사랑도, 지쳐서 나가떨어질 만하면 찾아온다. 일이란 어렵게 해야 하며, 고생하지 않고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을 너무 철저히 알고 있는 탓일까?


지금의 이 원고도 그러하다. 정말 별 것도 아닌 것이 세번의 대수술을 거쳐 완성되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진심으로 부끄럽고 자학적이 된다. 염소자리들이 자주 그렇듯이.


아아, 누군가 나를 개 패듯이 패줬으면.... 그러자 나의 사수자리가 위로랍시고 속삭인다. "다음달 쌍둥이 자리는 괜찮을 거야. 쌍둥이자리는 일을 쉽게 쉽게만 하도록 만드니까, 안 그래?"


아무튼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염소자리적인 문장으로 이 글을 서둘러 맺으련다.
"부족한 점에 대해서는 독자들의 많은 질정이 있기를 바란다."

글 - 페이퍼 김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