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5. 1. 15:51

처녀자리의 순결한 사랑

제 아내보다는. 제 비서가 되어 주시겠어요?

당최 진도가 안 나가는 처녀자리의 사랑 이야기


이런 여자가 있다. 반듯하고 단정한 이마를 가진 여자. 또랑또랑한 눈과 또박또박한 걸음걸이를 가진 여자. 조곤조곤하면서도 분명한 목소리와, 섬세하면서도 야무진 손가락을 가진 여자. 아침에 일어나면 그녀는, 가늘고 긴 머리칼을 빗어 넘겨 흐트러지지 않도록 고정시키고는 흡사 스위스 시계처럼 서두르지도 쉬지도 않으며 착실하게 움직인다. 재떨이를 비우고, 가구의 먼지를 닦고, 풀 먹인 식탁보 위에 반짝이는 식기들을 배열한다.


그녀를 지탱하는 건 건조하고 딱딱한 만족감이다. 가지런한 옷장을 보면 뿌듯하고 차곡차곡 정리된 그릇들을 보면 부자가 된 것만 같다. 그래서 아무리 시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비뚤어졌거나 오염된 것, 흐트러진 것을 잡아내는 데 있어 그녀를 이길 수는 없다.


하물며 사랑하는 이가 왔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이가 손을 잡으려 다가오면 그녀는 " 외투는 옷걸이에 거세요" 라고 말하고, 포옹을 하려고 하면 "담배를 끊겠다는 약속을 잊으셨군요." 라며 밀치고, 키스를 하려고 들면 "늦었으니 그만 돌아가세요." 라며 등을 떠민다. 마치 예수가 찾아왔을 때 식사준비에 여념이 없어 그의 말을 경청하지 못했다는 마르다 같다.


그녀는 어깨에 붙은 실밥을 떼어주는데 바빠, 사랑하는 이의 상심한 눈을 쳐다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어느날, 그녀의 구혼자가 변심하여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는데, "제 아내보다는, 제 비서가 되어주시겠어요?" 이 노릇을 어찌할꼬?


처녀자리의 사랑은 " 너무 쉽게, 그리고 자주 사랑에 빠지는 " 물고기자리의 반대편에 있다. 밤하늘을 둥글게 수놓는 열두 별자리의 배치상으로도 그렇다. 그러니 물고기자리의 반대말 같은 사람들이라고 상상하면 정답에 가깝다.


물고기자리는 흐리멍텅하지만, 처녀자리는 말똥말똥하다. 물고기자리는 막연하지만, 처녀자리는 분명하다. 물고기자리는 흐느적거리지만, 처녀자리는 모든 것을 분별하고 정리한다. '옳은가 그른가? 더러운 가 깨끗한가? 넘치는가 모자라는가? 그러니 모든 것을 세세히 분석하고 판단하는 맨숭맨숭한 눈으로 사랑에 빠질 턱이 있나. 그들은 아마 맨홀에도 안 빠질 것이다.


어쩌다가 그들은 그리 "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끔 " 생겨먹게 되었을까? 모든 것은 그들이 타고난 일꾼이기 때문이다. 별자리 상징을 눈여겨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들은 도상(고유의 별자리를 나타내는 그림 아이콘) 에서까지 일감( 밀 이삭 )을 들고 서 있다. ( 내가 아는 처녀자리 여인은 이 대목만 나오면 가슴을 치면서 꺼이꺼이 운다. )


그러므로 물고기의 생리를 이해함으로써 물고기자리가 가진 내면의 드라마를 이해하는 단서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늙은 양친을 대신해 집안일을 도맡는 처녀의 일상을 음미함으로써 처녀자리가 가진 섬세하고 복잡한 마음의 굽이굽이를 헤아려 볼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미혼의 처녀는 할 일이 많다. 부모는 늙었으니 때 되면 밥을 지어 올려야 하며, 청소도 제 손으로 해야 하고, 들에 나가 곡식도 건사해야 한다. 끝도 없는 일감에 싸여 감정은 나날이 메마르며 올올이 날이 선다. 그런데다 생각도 많고 복잡하다. 익숙한 집과 육친을 떠나 낯선 남자와 살아야 하는 머지 않은 미래가 그녀를 숨막히게 한다.


아아, 잘할 수 있을까. 잘못되면 어쩌나. 그녀는 결혼이 두렵고 불편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그것은 두려운 기대와 불편한 갈망 같기도 하다. (이것이 처녀자리가 가진 성에 대한 이중성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주위를 둘러본다. 내가 그만 불결한 생각에 빠진 걸까? 성급히 성호를 긋고 붉어진 뺨을 쓰다듬는다. 그런데 이때 이웃집 아낙이 웃고 지나간다.


그녀는 초조해진다. 속마음을 들킨 것만 같다. 그녀는 다시 머리를 단정히 하고, 매무새를 가다듬고, 단추를 목덜미 끝까지 채운다. 더 많이 자신을 결박한다. 조심성이 지나쳐 냉랭해지고, 야무지다 못해 신경질적이 되어간다.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작정으로,혹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일상이 직업병이 되어버린 까닭에, 남들의 흠집을 들춰내 핀잔을 주는 데 명수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처녀자리의 인생과 사랑을 움직이는 원리다. 그들은 세상의 규칙과 질서에 복무한다. 간호사가 되어 망가진 몸을 수선하거나, 영양사가 되어 분별 있는 식단을 짜고, 비서나 회계사가 되어 일 처리가 정확하고 정교해지도록 돕는다. ( 자랑스러워하라!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사전을 만든 이도 처녀자리인 사무엘 존슨이다. )


더 나아가 몇몇 야심적인 처녀자리들은 어수선한 세상을 아예 제 나름의 규칙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그것이 문학이며 철학이다. 처녀자리들은 훌륭한 시인은 아니지만 (빈약한 상상력과 메마른 감정 탓이다.) 훌륭한 소설가들이다. 또, 철학이나 비평같이 정교하고 아귀가 딱딱 맞는 논리를 내놓고 입씨름을 벌이는 데 가장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것도 처녀자리다.


그러므로, 충고하건대 처녀자리와 언쟁을 벌이지 마라. 꼭 언쟁을 벌여야 한다면 시간을 두고 대응할 수 있도록 서면으로 하라. 이것은 물고기자리와 동업하지 않는 것과 아울러 나의 별자리 원칙이다. 편견을 조장한다고 말한다면, 편견의 다른 이름은 상식이며, 과잉 일반화의 독소는 상식을 활용함으로써 얻게 되는 편리함의 대가라고 답하겠다. 당신이 지혜라고 부르는 것 중에 편견 아닌 것이 있으면 어디 말해 보라. ( 갑자기 왜 이리 딱딱거리냐고? 미안하다. 처녀자리를 쓰다보면 처녀자리가 되는데, 그것은 내가 물고기자리이기 때문이다. )


다시 처녀자리의 사랑으로 돌아가자. 맨정신으로 사랑을 하려는 자는 눈을 감지 않고 꿈을 꾸려는 바보와 같다. 처녀자리들이 그렇다. 그들은 섬세하고 정교한 분별력으로 사랑을 분석하고 해부한다. 카프카가 묘사했듯이, 사랑이란 들고 있는 팽이와 같아서 어떻게 해서 도는지 조사하기 위해 팽이를 멈추면 그것은 매력을 잃어버리게 되는데도.


그들은 자기가 ( 아니면 사랑이 ) 나가 떨어질 때까지 끈질기게 묻는다. 이 사랑은 적절한가? 과연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인가? 한때 지나가는 감정은 아닐까? 이 질문을 견딜 수 있는 사랑은 드물다.


그러므로 처녀자리의 사랑은, <화양연화>의 장만옥이 그랬듯 팔뚝만 으스러지게 움켜쥐는 것으로 이별을 감수하거나, <센스 앤 센서빌러티>의 앨리노어처럼 " 난 감정을 믿지 않아요." 라고 선언하게 만든다. 더 흔하게는 독신주의자의 칭호를 선사한다. 그레타 가르보에서 프리드리히 니체, 장미희에 이르기까지. 독신주의자의 계보도는 숱한 처녀자리들의 이름으로 장식되어 있다.


하지만 처녀자리 들이여, 우울해질 것은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잃는 것이 있다는 건, 어딘가 얻은 것이 있다는 말일 게다. 그대들이 인생에서 접어두어야 하는 건, 꿈결같은 사랑이나 순수하고 격렬한 기쁨이다. 그 순간조차 그대의 눈과 손은 무의식적으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반응할 것이므로, 애인과 데이트를 하다가도 간판의 오식을 보면 머릿 속으로 교정부호를 그려 넣게 된다는 어느 잡지 편집장처럼 말이다.


황홀감은 사라진다. 하지만 대신에 그대들은 땅의 일꾼이 될 것이다. 현실을 천착할 것이다. 적어도 물고기 자리처럼 사랑에 속고 돈에 울지는 않을 것이다.나날을 일과 질서와 안정된 생활로 착실하게 경영해 나갈 것이다. 흐트러지지 않으려고, 잘못되지 않으려고, 정말이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빈틈없는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그 대가로 주기적인 히스테리와 신경질을 배출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거래 아닌가?


당신이 처녀자리가 된 건, 어쩌면 사랑을 양보하는 대신 질서와 규칙을 구하겠다고 신과 계약을 맺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소망한다. 언젠가 많이 부유해진 내가 처녀자리 비서를 얻게 되기를.


그리고 미래의 어느 날, 나의 비서가 되어주기를 감히 간청하는 마음으로, 건조주의보가 발효중인 그대의 메마른 로맨스를 위한 수분 크림 같은 처방전을 바친다.

" 술 취하라. 길을 잃어 보라. 도박을 하라. 가장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루종일 해보라. 그리하여 이성을 무장 해제하라. 이성의 골통에 주먹을 날려라. 제발 '올바르게 사랑에 빠지는 법?  따위는 생각하지도 마라. "


사랑에는 메뉴얼이나 나침반이 없다.
우리는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사랑을 한다.
하지만 사랑을 해보지도 않고서, 어떻게 사랑이 뭔지 알 수 있을까?
이것이 그대와 나의 고민이다.


글 - 페이퍼 김은하